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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예산이란 무엇인가. 정부 재정을 연구하는 나에게는 화두와 같은 질문이다. 예산은 정부 가 일하게끔 하는 원천이다. 정부가 하는 일은 매우 많고 다양하다. 국방과 치안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함으로써 사회가 유지될 수 있게 한다. 공교육은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어엿한 한 사람으로서 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생계급여 같은 복지지출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정 수준의 생활을 누리게 한다.
내년도 정부 예산은 600조 원이 넘을 전망이다. 여기에 정부 예산에서 제외되는 정부지출까지 더하면 정부가 한 해에 쓰는 돈은 700조 원이 넘는다. GDP 대비 규모로 따지면 30%가 훌쩍 넘는다. 이 돈을 정부가 스스로 벌어오지는 못하니, 결국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가야 한다. 정부가 민간이 벌어들인 돈 중에서 30%를 가져다 쓰면 민간은 70%만 쓸 수 있다. 내가 400만 원을 벌면 그중 280만 원만 내 맘대로 쓸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30%가 아니라 20%로 지출을 줄이면 내가 맘대로 쓸 수 있는 돈은 40만 원이 늘어난다. 그래서 예산, 그리고 정부 활동이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다음 물음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쓰는 1억 원이, (세금을 그만큼 덜 걷음으로써) 국민이 알아서 1억 원을 쓸 때보다 더 큰 효용을 창출하는가?” 아니라면 정부지출의 정당성은 상실된다.
‘정부지출은 모름지기 국민 개개인이 쓰는 것보다 더 큰 효용을 창출해야 한다’. 멋진 말이기는 하다. 그런데 대체 개개인이 쓰는 것보다 정부가 더 가치 있게 쓰는지를 어찌 알까? 어떤 기준을 충족해야 정부가 가치 있게 돈을 쓴다고 할 수 있을까? 일단 떠오르는 기준은 ‘낭비 없이 알뜰살뜰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꼭 필요하지만 개인이 감당하기는 어려운 일에 사용해야 한다’도 또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자는 효율성 기준, 후자는 공공성 기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확실히 효율성과 공공성은 좋은 예산이 갖춰야 할 두 기준이다. 그런데 이 둘은 종종 충돌한다. 이 글은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에 기고한 것이니 보건의료 예산을 예로 들어보자. 공공보건의료 지출 중 최근 내 눈길을 끈 것은, 초고가 신약들의 건강보험 급여인정이 이뤄짐으로써 치명적인 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내는 신약 치료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올봄에는 백혈병 치료제인 킴리아의 건강보험 적용이 이뤄졌다. 그 덕에 3억 6천만 원짜리 약품이지만 600만 원 미만의 본인부담금으로 투약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달 전에는 척수성 근위축증 치료제인 졸겐스마도 건강보험 급여인정을 받았다. 척수성 근위측증은 태어날 때부터 운동신경 세포 이상으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생명이 위험해지는 질환이다. 졸겐스마 약가는 20억 원 정도인데 보험급여 적용으로 본인부담금은 600만 원 미만이 되었다.
보험은 평소에 꾸준히 일정 금액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해 큰 비용이 들어갈 때 이를 보전해 준다. 감기에 걸렸을 때 치료비를 커버해 주는 것도 건강보험의 역할이기는 하다. 하지만 건강보험의 본래 취지는 큰 비용 들어가는 질환에 걸렸을 때 치료비를 보전해 줌으로써 돈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고가 신약에 보험급여를 적용하여, 돈 때문에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건강보험의 기본 기능이며,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겠다.
의료의 공공성을 따지면 확실히 맞는 말이다. 맞기는 한데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효과성은 알기 어려운 반면에 가격은 매우 비싼 신약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유전자 공학의 발전으로 세포‧유전자 치료제가 대거 등장했는데, 이들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20억 원의 졸겐스마가 가장 비싼 치료제였다. 그런데 얼마 전 미국 FDA가 수혈 의존성 빈혈 치료제인 진테글로를 40억 원(280만 달러)으로 승인한 바람에 최고가 약재 기록이 갱신되었다. 신약 가격은 제조원가로만 결정되지는 않는다. 신약개발에 들어간 R&D 비용도 포함되어야 하고 특허 기간도 고려해야 한다. 이런 비용은 투명한 산출이 어렵다. 그래서 신약 가격 책정은 오리무중이다. 가장 비싼 약인 진테글로는 미국 진출에 앞서 유럽에 먼저 진출했다. 당시에는 180만 달러를 책정했으나 가격 협상에 실패하여 철수했다.
의약품이 건강보험 급여인정을 받으려면 비용-효과성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들어가는 비용 대비 일정 수준 이상의 효과가 입증되어야 한다. 최근의 신약은 비싸다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효과성 입증이 어렵다는 데 있다. 효과성을 검증하려면 다수 사례를 오랜 시간 조사해야 한다. 그래서 출시된 지 얼마 안 지났고 환자 수가 적으면 제대로 된 효과성 판단이 어렵다. 아직 효과가 불분명한 신약, 기존 약품보다 효과가 낫기는 할 것 같지만 터무니없이 비싸게 책정된 신약의 보험급여를 인정해야 할까, 아니면 좀 더 두고 봐야 할까. 환자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다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치료받고 싶다. 하지만 건강보험 재정도 관리해야 하는 정부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판단하겠는가.
판단에 앞서 실제 상황은 어떨지 유추해 보자. 고가 신약의 보험 인정은 엄격할까 아니면 느슨할까. 얼핏 생각하면 인간미 떨어지고 경직된 관료제 하의 의사결정이니 매우 엄격할 것 같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다르다. 고가 신약의 보험급여 승인은 특성상 비난보다 칭찬이 많다. 환자도 원하고 의사도 원한다. 특히 (막강한 로비력을 지닌) 제약회사가 원한다. 무엇보다 ‘생명이 우선이다’라는 명분이 강력하다. 공무원 입장에서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닌데 굳이 까다롭게 따질까.
공공성과 효율성의 우선순위는 사안에 따라 다르다. 생명과 관계된 사안은 당연히 공공성이 우선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으로 효율성을 얼마나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에 있다. 진테글로 약가는 미국에서 280만 달러로 정해졌지만 유럽에서는 180만 달러로 협상했다. 고가 신약 보험급여를 승인하더라도 최대한 가격을 낮추려는 노력은 필요하다(그래도 절대 제약회사는 손해보지 않는다). 우선 승인했어도 효과를 계속 모니터링 하여 나중에라도 비용-효과성을 파악하고 부적합하면 재검토해야 한다.
그 간의 고가 신약 승인 상황을 살펴보면 엄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공성을 중시하면서 또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고민도 느껴진다. 앞으로 혁신적인 고가 신약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럴수록 환자들이 신약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되 재정이 낭비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은 더욱 중요해진다. 어디 의약품뿐이겠는가.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정부가 하는 많은 일에서 공공성과 효율성의 조화는 더욱 중요해지고 그만큼 정교해져야 한다. 따지고 보면 국민의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것도 공공성의 중요한 덕목이다. 공공성을 높이기 위한 공무원의 분투를 기대하며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이 글의 전반부 일부 내용은 내가 쓴 경향신문 칼럼(2022. 9. 16)에서 인용한 것이다.
⁋ 해당 분야 전문가의 견해를 담은 칼럼으로 서울시 및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